시계이야기

[시계의 역사] 2. 세계

  • 작성자TMwatch
  • 등록일2004.06.08 17:31
  • 조회482
자료출처 - [ http://my.dreamwiz.com/bbbaytm2 ]

고대 사람들은 낮과 밤의 반복에 의해 날을 세고 달력을 만들었으며, 그림자의 변화에 따라 시간의 경과를 알았다.

최초의 시계는 1개의 막대를 땅 위에 세웠던 그노몬(gnomon)이다. 고대이집트에서는 오벨리스크가 그노몬으로 쓰였고, 지침(指針)은 지축에 평행하게 기울어지도록 하여 1년 동안 그림자 길이는 변화해도 방향은 변하지 않도록 개량되었는데 이것이 해시계(sun dial)이다.

해시계는 처음에 바빌로니아. 이집트에서 만들어져 차츰 동.서로 전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해시계는 밤 동안이나 날씨가 궂은 때에는 사용할 수 없고 시간을 세분하는 데는 적합하지 않았기 대문에 이 결점을 보완하여 물방울을 이용한 물시계 클랩시드라(clepsydra ;물항아리)가 고안되었다.

고대이집트에서는 이미 1년을 365일로 하는 달력을 사용하고 있었고, BC 1550년 무렵에는 이러한 종류의 시계를 이용하여 낮과 밤을 각각 12등분하였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다. 그 뒤 물을 모래로 바꾼 모래시계, 불시계(양초.램프)등이 고안되었으며, 각각의 특징에 따라 근세까지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계는 정밀도도 떨어지고 늘 해시계와 비교하면서 어떤 시간을 등분하는 보조적인 장치였다.

이러한 초창기의 시간측정방법들은 대개 땅위에 세운 막대기의 그림자가 가장 짧아지고 이튿날 다시 똑같은 상태가 될 때까지의 시간이 진태양일(眞太陽日)인데, 이 진태양일 하루의 길이는 1년을 통해 많은 변화가 있다. 따라서 이 불편을 없애기 위해, 유럽에서는 18세기 중엽부터 19세기 말에 걸쳐 1년마다 평균을 내어 평균태양일을 정하고 이것을 24등분한 것을 시(hour), 시를 60등분하여 분(minute), 분을 60등분하여 초(second)로 하는 제도가 시작되었다.

1927년 수정시계가 출현하여 차츰 정밀도가 향상되자, 그때까지 최고의 정밀도를 지닌 시계였던 지구자전 속도(정밀도 ±1억분의5)의 불규칙성이 발견되어 이것이 정확한 시계의 기준이 될 수 없음이 판명되었다. 이리하여 60년 국제도량형회의 총회는 1초를 1900년 초 시점에서 측정한 1태양년의 3155만 6925.9747분의 1이라고 정의하고 이것을 시간의 단위로 하였다.

또한 67년 이 총회는 그 1초에 맞추어 국제단위계(SI)의 시간 단위<초>를 세슘 133의 바닥상태에서 2개의 초미세구조 사이의 전이(轉移)에 대한 방사 주기의 91억 9263만 1770배로 했다. 이리하여 초의 단위는 천문학적 정의에서 독립하였다.

현재 우리는 시를 시각으로서 파악하는 천체관측에서 유리하는 시계(時系 ; 세계시. 역표시)와 원자시계라는 2개의 시계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기계시계가 발명된 것은 1300년 전후로 본다. 14세기가 되자 북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의 주요 도시는 시간을 알리는 장치가 있는 공공 시계탑을 다투어 설치하였다. 파리의 대법원에 있는 시계는 1370년 독일인 H.비크가 프랑스의 샤를 5세를 위하여 만든 것으로 현존하는 것 중 가장 오래된 시계로서 유명하다.

또 이탈리아의 G.돈디가 제작한 천문시계, 높이 1.4m의 시계는 현존하지는 않으나 1364년에 씌어진 문헌에 기록이 남아 있으며, 1960년 그것의 정확한 복제품이 만들어져 미국의 스미스소니언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당시의 시계구조는 무거운 추의 힘으로 기어를 회전시켜 관형탈진기(冠形脫進機)에 관성이 큰 막대템포를 물려 축의 회전을 억제하는 방식이었다. 막대템포 자체는 오늘날의 진자나 템포처럼 등시성(等時性)을 가진 진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시계의 오차는 하루에 30분이나 되었다. 이 때문에 당시의 시계는 시계바늘이 1개 뿐이었고,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종으로 시각을 알리는 것이었다.

14세기에 만들어진 대부분의 시계에는 글자판이 없었다. clock의 어원이 종(鐘)이 되듯이 일반시민은 종소리에 맞추어 생활하게 되었고, 그때까지의 부정시법 대신 하루를 24등분하여 시를 구분하는 정시법이 생겼다. 이러한 공공시계가 그대로 실내에 맞는 크기로 소형화된 것은 14세기 말이었으며, 일반의 부유한 가정에서 볼 수 있게 된것은 16세기가 되면서부터이다.

태엽 발명에 의해 탁상시계가 만들어진 것은 15세기 전반이었으며 역시 이탈리아에서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그러나 시계 제조의 중심은 15세기 말, 남독일에서 조금 뒤 프랑스 블루아로 옮겨갔다. 뉘른베르크의 자물쇠공 P.헨라인이 1510년 무렵 회중시계의 전신인 휴대시계를 만든 일은 유명하다. 태엽시계의 가장 큰 문제점은 감긴 상태에 따라 태엽의 힘이 크게 변동하여 시간이 맞지 않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발명자는 분명하지 않지만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남긴 기록에 보이는 균력차(均力車; fusee)와 스택프리드(stack freed)장치가 고안되었고, 16~17세기의 휴대시계에 이 중 어느 하나가 사용되었다.

초기의 휴대시계는 두꺼워, 목 또는 가슴에 걸었으며 시간을 알리는 장치를 갖춘것이 많아 클록워치라 하였다. 1600년 전후에는 십자가. 두개골. 동물. 과일. 별. 꽃 등 진기한 모양을 한 시계가 많이 만들어졌으며, 그 후 오늘날과 같은 동그란 모양으로 정착되었다. 케이스는 귀금속이나 에나멜이 사용되었는데, 아름다운 에나멜그림 때문에 시계는 미술공예품. 보석장식품으로 취급도기도 했다.

1583년 G.갈릴레이에 의해 진자의 등시성이 발견되자 네덜란드의 과학자 C.호이겐스는 이것을 시계에 이용하여 1657년 최초의 진자시계를 완성하였고, 75년 템포와 소용돌이 모양의 유사(遊絲)를 조합시킨 조속기(調速機)를 발명하였다. 이 등시성을 가진 조속기의 발명은 시계의 정밀도를 높여. 고정밀도화의 길을 열었다.

17세기 전반 네덜란드의 번영 이후 세계경제의 중심이 영국으로 옮겨짐에 따라 시계에 관한 발명도 영국에서 많이 이루어졌다. 16세기 이래 에스파냐.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등의 해운국이 <경도(經度)의 발견>을 국가적 과제로 삼아 최고의 정밀도를 지닌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시계 머린크로노미터의 제작을 장려한 일도 있으며, 1704년 런던에서 활동하고 있던 스위스인 N.파티오가 루비에 구멍뚫는 방법을 발명함으로써 보석베어링의 채용, 17세기의 R.훅, W.클레망, T.톰피온, G.그레이엄, T.머지 등의 탈진기에 관한 발명, 그레이엄의 수은보정진자 등 18세기에는 주요한 발명이 뒤를 이어 시계의 구조는 크게 개량되었으며 많은 기능이 부가되었다.

19세기가 되자 차츰 공장이 설립되었고 개인에 의한 제작은 그 모습을 감추었다. 그때까지 세께 제일의 시계산업국이었던 영국은 1840년 무렵부커 쇠퇴했으며 대신 스위스가 대두하기 시작하였다. 20세기 초에 출현한 손목시계는 제1차세게대전후 크게 유행하였고, 1924년에는 영국의 J.하우드에 의해 자동태엽손목시계가 시판되었다. 시계의 정밀도 향상에 큰 공헌을 한 사람은 스위스의 C.E.기욤이다. 기욤은 니켈철합금, 온도변화에 대하여 신축이 적은 인바(invar)와 탄성변화가 적은 엘린바의 발명으로 1920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인바는 진자의 대(臺)등에, 엘린바는 템포의 유사에 사용되어 시계의 실용정밀도를 크게 높였다.

18세기는 시계의 구조. 기능에 대한 개량시대, 19세기는 제조법의 개혁. 진보의 시대, 20세기는 시계산업에서 기계시계의 완성기, 그리고 혁명적인 전기. 전자시계로의 전환시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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